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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울 유
짧아진 가을의 끝에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가을과 닮아 보여요.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것처럼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과 함께 야밤의 가을 공기를 맡고 있는 것은 아마도 곧 떠나버릴 것 같은 가을의 향을 조금이라도 더 맡아두고 싶은 것이겠지요. 이것은 미련이자, 후련하고 싶지만 후련할 수 없는 우유부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조용히 사라질 이 가을의 공백에 남았을 때, 내가 너무 춥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이 사이에도 가을의 밤은 여전히 시원함과 약간의 서늘함을 머금은 입김을 뱉고 있습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습니다. 올려다본 나무에 몇 잎 남지 않은 잎새는 모래시계 같았습니다. 이 잎이 모두 떨어지면 떠나겠다고 알려주는 건가요. 조급한 마음을 달랠 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뭐지’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충격, 아마 근래 본 영화 중에 가장 충격적인 연출이 아니었나 싶었다. 만화가라는 꿈과 서로를 동경하는 후지노와 교모토의 성장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경험이 연쇄작용처럼 어우러져 같은 뿌리지만 다른 길을 선택하는 우리의 삶과 닮아 보였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을 품어봤던 사람이라면 잊었던 온기를 다시 한번 더 떠오르게 만드는 울림이 이 영화 속에 있다. 어린 시절 바랬던 꿈과 막상 이룬 꿈의 현실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는 후지노에게 교모토는 자신이 후지노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온 것처럼 자신의 등을 보여줌으로써 후지노에게 다시 한번 삶을 돌아보고 나아가길 바란다. 마지막 후지노..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나는 쉽게 화낼 일이 별로 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저 들어주면 되고, 아무거나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한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의 몫만큼 경험을 더 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라도 무심하게 무시받곤 한다. 단 한 가지, 둥글둥글한 내가 화를. 아니 화를 넘어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증오함을 느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을 자기 손바닥 위에 두고 있다는 마음을 가진 이’를 향한 감정이리라. 그것은 때로 내로남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하튼 내가 용서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이것이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이기적인 ..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꾸준히 일본어 공부를 했고, 일본어 수업을 듣기 위해 강화 여자고등학교에서 주말에 진행한 일본어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에 참여하면 생활기록부에 일본어 수업을 들은 것으로 기록되기도 했기에 추후 입시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시선이지만 함께 일본에 갔던 친구들은 생각보다 일본인과 대화를 무리 없이 잘 나누는 나의 모습에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크게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한 해가 거의 다 저문 16년의 겨울방학 나는 또다시 한번 오사카행 티켓을 예매했다. 다만 이전의 여행과 다른 것은 내가 주최해서 친구들을 모아 여행을 한다는 것. 일행으로서 여행해 참여하는 것과 주최가 되..
일본과 나의 첫 단추 고등학교로 입학하기 전, 중학교 3학년 나는 일본 소년만화에 꽂혀서 친구들이 수학의 정석이나, 영단어를 외울 때 일본어 단어와 문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무슨 일본어를 공부하냐고 쓸데없이 일본어 공부할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거나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풀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런 태도를 의식하고 있었다면 꽤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만 당시에는 일본어, 그리고 일본어를 넘어 일본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커져 그런 비아냥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베트남을 다녀온 뒤, 베트남 해외교류에서 친해진 한 학년 선배와 친해졌는데, 그 선배가 연말에 일본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나와 준혁이에게 물었다.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던 나는 바로 좋다고 ..
15년도의 봄이었다. 15년도의 봄이었다. 기대했던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의 생활보다 조금 더 학업에 비중이 높아졌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희한하게 남들과 같은 행동을 하기 싫었던 나는 이 매일 같은 삶을 벗어나고자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그러던 중 베트남의 자매결연 학교와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영어로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외에도 기본적인 소양으로 요구되는 것이 많았지만, 나는 그냥 하고 싶어서 조금의 거짓말을 덧붙여 지원했다. 어설픈 영어는 몸과 입을 번갈아 가면서 표현되었고 기대도 안 했던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미성년자인 자식을 해외로 보내는 것이 신경 쓰이셨던 부모님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